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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맷돌질하는 여인

한국의 국민화가 유홍준(미술평론가/명지대 교수) 1. 한국의 현대미술은 아직 외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백남준의 국제적인 활약과 한국 아티스트들이 각종 아트 페스티벌에서 보여주고 있는 창의적인 모습은 비교적 알려져 있지만 지난 1세기 동안 한국 내에서 걸어온 발자취에 대해서는 거의 소개된 바가 없다. 예술이 스포츠와 크게 다른 것은 그 순간의 기록과 경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관객 앞에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이 발표된 시점에선 크게 주목 받지 못했어도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제 빛을 발한 예는 무수히 많다. 세잔느가 그랬고 반 고흐가 그랬다. 한국의 현대미술에도 박수근(1914-1965)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는 가정형편상 화가 수업을 받은 일도 없었고 평생 가난한 삶 때문에 캔버스와 오일을 살 돈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캔버스 대신 종이 위에 아주 작은 작품을 그리면서 자신의 예술적 의지와 혼을 담아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그의 소품들은 날이 갈수록 제 빛을 발하여 오늘날에는 마치 지난 시절 잃어버린 보석처럼 빛나면서 한국인들은 그를 ‘우리의 화가’, ‘국민화가’로 칭송하고 있다. 2. 화가 박수근의 이력서는 아주 초라하다. 그는 평생 개인전 한번 열어보지 못하고 나이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14년 한반도의 정 가운데 있는 높은 산악지대의 작은 도시(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그림 솜씨를 보였으나 그는 더 이상 진학하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에 열중하였다. 그는 18살 때 당시 국가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유일한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라는 수채화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이것이 화가로서 그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이후 3년 연속 낙선하는 고배를 마시고 22세 되는 1936년에 <일하는 여인>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이후 이 공모전이 끝나는 1943년까지 해마다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시험 받곤 했다. 25살에 결혼하여 지금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일자리를 얻어 그곳의 화가들과 그룹전을 열기도 하고 아들과 딸을 낳아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이런 안정된 생활은 3년 만에 끝나고 만다. 당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를 받고 있었다.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한국은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지만 한반도는 전시체제에 휘말려 있었고, 1945년 해방된 뒤에는 남북으로 갈라져 대립하다 끝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3년간 전쟁의 도가니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 전란의 시절에 박수근은 남한으로 내려와 서울 변두리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살게 되었다. 그는 지방 도시로 내려가 부두노동자를 하기도 하였고 미군 PX에서 미군 병사들이 기념품으로 만들어가는 ‘손수건 위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그의 삶은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박완서가 <벌거벗은 나무>라는 소설에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박수근에게는 아무런 일거리가 없었다. 그는 도시 빈민에 불과했다. 그의 유일한 수입원은 반도호텔 내에 있는 당시 유일한 갤러리인 반도화랑에서 이따금 팔아준 그림 값이 전부였다. 당시 그의 그림 값은 30 달러 정도였고 한국의 국민소득은 개인당 70달러였다. 미술품 거래라는 것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박수근의 작품은 특히 외국인들이 좋아하여 간간히 팔리곤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소품인데다 값이 저렴하였고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서정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외국인 중에 주한 미국 외교관의 부인인 마가렛 밀러 여사는 박수근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녀는 박수근의 그림을 수십 점 소장하였고 다른 외교관 부인들과 함께 아뜰리에 탐방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의 낡고 허름한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귀국 후에도 편지로 박수근의 그림을 구입해 주었다. 이렇게 그녀가 미국에서 작품을 구입해 주면 박수근은 그림 값 대신 그림물감을 사서 보내 줄 것을 부탁하곤 하였다. 지금 그의 고향인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소장된 밀러 여사의 편지를 보면 가난한 화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애틋하게 남아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다시 열리기 시작한 국가 공모전에 출품하여 <우물가>가 특선되고 <노상에서>가 입선을 하면서 화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절구질하는 여인>이 입선되고, 그 이듬해에는 <두 여인>이 국회 문공위원장 상을 수상하는 등 화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다져갔다. 그러나 1957년, 43세 때 모처럼 1백호의 대작을 그려 출품한 것이 낙선되자 크게 실망하고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폭음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오늘의 시점에서는 이해되기 쉽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국전을 통한 미술활동이 화가 이력의 전부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수근의 상심은 그렇게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국전 출품을 포기하고 그림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에는 추천작가로 초대되었고 62년에는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화단에서 명예를 회복했다. 3. 그는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 박수근은 또 아이들의 천진스런 모습도 즐겨 그렸다. <동생을 업고 있는 언니>, <독서하는 소녀>. 그러나 그는 남자를 그릴 때면 늘 <쉬고 있는 남자>를 그리곤 했다. 사실 이런 대상들은 그가 살아가면서 늘상 대하던 도회지 풍경들이었다. 박수근은 이런 서민들의 일상적 모습(everybody's everyday life)을 어떤 누구와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사실주의도 낭만주의도 인상주의도 표현주의도 아닌 박수근만의 형식이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대상들이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그 인물들이 있는 그대로 화면 속에 고착되어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애정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화면을 아주 두텁고 거친 마티엘 기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대상들은 한결같이 이 거친 마티엘 속에 가늘고 굵은 검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하여 그가 묘사한 인물들은 화면 속에 고착되어 있는 암각화 같은 느낌을 준다. 박수근 예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밀러 여사는 귀국 후 그의 예술세계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65년에 한 잡지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 화가, 박수근>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박수근이 어떻게 이 두터운 마티엘 효과를 나타냈는지를 화가에게 직접 들은 대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그림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 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든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과감하게 검은 윤곽선을 이용하여 대상을 스케치 넣는다.” 이것이 박수근의 독특한 조형어법이고 서양의 어느 화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개성으로 되었다. 이 마티엘 기법을 통하여 그가 얻어낸 예술적 효과는 마치 한국의 산천에 즐비한 화강암 암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처럼 그 대상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거기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다만 거기에 묘사된 대상이 부처가 아니라 정직하고 순박하고 꾸밈없이 살아가는 서민의 모습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박수근은 겨울나무도 즐겨 그렸다. 그 나무 또한 특별한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로 치면 서민적인- 나무이다. 그리고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면서 새 봄을 기다리는 벌거벗은 나무들이다. 이 또한 그의 인물화에서 보여준 예술적 내용과 다르지 않다. 즉 현재의 삶은 힘들어도 묵묵히 견디면서 희망을 잃지 않은 그런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4. 서양화의 기법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약 1세기 전이다. 한국인들은 중국, 일본 등 다른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서구화를 통하여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전통적인 수묵화의 기법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이도 있었지만 서양화의 조형어법과 예술정신을 충실히 배워 한국의 근대, 현대 미술문화를 만들어 간 이도 있었다. 처음에는 서양화의 기법을 익히는데 충실하였다. 그리고 그 기법이 익숙해진 다음에는 추상미술을 비롯하여 조형언어 자체를 탐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첨단적인(up-to-date) 경향에 뒤지지 않으면서 세계미술의 경향에 시차 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 화가들이 서양미술의 기법과 정신을 맹목적으로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조형어법을 익히면서 서양미술사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그림 세계를 이룩한 화가도 적지 않다. 그 중 대표적인 화가가 박수근이며 한국인들은 우리 현대미술에서 이런 훌륭한 화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박수근이 이룩한 예술적 성과를 서양미술사의 흐름에서 어느 사조에 해당하는가를 따져 본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는 시대사조의 경향에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이 독창적인 그림 세계를 실현해 갔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양 사조를 열심히 따랐던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가 일찍이 말했던 유명한 정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박수근의 예술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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